[언론] '판도라' 본 文정부 탈원전? 그 영화에 난 원자력전공 택했다 [곽승민의 일리(1·2)있는 논쟁]

2022-03-24l 조회수 399

'판도라'. 이 영화 한 편이 시작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아니라 저의 전공 선택 얘기입니다. 2016년, 그러니까 세종과학예술영재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다 같이 ‘판도라’를 보러 갔습니다. 격납 용기가 폭발하고 배관이 파괴돼 노심이 용융되는 등의 사고를 그린 그 영화 말입니다. 원자력발전소의 안전 시스템이 한순간 무너지는 영화 속 모습을 보고는 의구심 반, 불안감 반이 뒤섞인 채 원자력에 대해 혼자 공부했습니다.
제가 찾은 정보는 영화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국내 원자력 발전소의 격납 용기는 27톤 비행기가 시속 800km로 충돌해도 외벽만 살짝 손상될 정도로 튼튼한 데다 내진 설계 역시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고 원전 위험성에 놀라서 급진적인 탈원전 정책을 구상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2017년 문 정부 출범 이후 탈원전은 급발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관련 전공 학부생마저 암울한 미래에 이탈한다는 흉흉한 말들이 있었지만 저는 주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2018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안전성은 물론 원자력 전반에 대한 정보를 찾던 고교 시절 접한 문장 하나가 저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지만 원자력은 사람 머릿속에서 캐내는 에너지다.” 미국 정부 과학 고문이었던 워커 시슬러(1897~1994) 박사가 1958년 이승만 대통령에게 했다는 조언입니다. 단순히 원자력과 다른 에너지원의 차이를 말하는 것 이상으로 시사하는 것이 많은 말입니다. 에너지 자원도 없고 수급도 어려운 악조건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전쟁 몇 년 후인 1958년에 원자력법을 빠르게 제정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미래를 준비한 덕분에 우리나라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성장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물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트렌디한 분야보다는 국가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학문을 하고 싶었기에 주변의 우려를 접고 전공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비록 지금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밀고 있지만 오래 못 간다'는 확고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지진 나면 원전으로 달려!"

그리고 입학 후 이런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더 깊게 공부하다 보니 원자력 발전소야말로 정말 사고의 사고의 사고까지 고려해서 만든, 안전장치를 다중으로 적용한 안전한 시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전문용어로 다중 방호(Defense in Depth)라고 하는데, 핵연료를 감싸고 있는 피복관을 시작해서 마지막 5단계가 격납 용기입니다.

실제로 원자력 발전소 내부 시설을 견학을 갔을 때 격납 용기의 두께를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학과 동기들끼리 "지진이 나면 제일 먼저 원자력 발전소로 달려가야 한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저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만 주변 반응은 아주 다릅니다. 원자핵공학과 재학 중이라고 말하면 처음 만난 택시 기사까지 걱정하면서 전과나 재수 등 다른 진로를 권유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그런 선택을 한 친구 몇몇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약 없는 불확실성이 원자력을 포기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탈원전 정책이 얼마나 오래 지속할지, 그 기간 동안 과연 원자력 계가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받지 않고 살아날 수 있을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기에 모두 불안감이 매우 컸으니까요.

이 와중에 신기한 일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입학 2~3년 후 세부 전공 선택을 봤더니 원자력을 전공하겠다는 친구들이 늘어난 겁니다. 원자핵공학과는 크게 원자력·핵융합·산업 플라스마·방사선 분야로 나뉘어 있는데, 입학 초반엔 다른 전공을 고려하던 친구들 가운데 결국 원자력 분야를 선택한 경우가 꽤 됐습니다. 초기엔 탈원전 정책 탓에 다른 전공을 택했지만 공부할수록 원자력의 안전성과 우수성에 대해 알게 되고, 또 탄소 중립을 위한 원자력 부활이라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서 원자력을 택한 게 아닐까요.

원자력이라는 학문의 매력에 빠지는 것과 동시에 2018~19년 겨울 저는 탈원전 반대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비과학적인 정책 결정 방식이 너무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잘못된 정책이고, 우리나라 미래가 달린 중요한 사안인 만큼 굳은 결심으로 칼바람을 맞으며 거리에 나갔지만 마음 한켠에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과연 몇 명이나 서명해줄까, 아니 서명을 받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런 생각 말입니다. 욕먹을 때도 잦았지만 열에 두셋은 "몰라서 묻는데 정말 안전하냐"고 질문을 하더군요. 설명하면 "덕분에 원전이 안전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고맙다"라고 인사를 하고요. 이 과정을 통해 실험실 안에서의 연구뿐 아니라 소통의 중요성을 체감했습니다. 서명이 20만을 넘기면서 더더욱 힘이 났습니다.

강남에 원전? 와이 낫?

원전 반대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도 안전하고 좋으면 전기 많이 쓰는 서울 강남에나 지으라는 말입니다. 지난 대선 토론에서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도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에게 "SMR(소형 모듈형 원전)은 전력 수요 많은 곳에 짓는 게 효율적인데 그러면 강남에 원전을 지어야 하는 게 아니냐"라는 식으로 질의했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쌀 많이 먹는다고 서울을 논밭으로 채워야 하나요? 공간이 비좁기도 하지만 땅값이 비싸서 서울은 부지 마련이 쉽지 않습니다. 강남에 원전을 안 짓는 건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공간 제약의 문제가 가장 큽니다. 부지 문제만 해결된다면 서울 인근이라도 SMR 건설에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작은 마이크로 모듈형 원전(Micro Modular Reactor)은 공간 제약이 기존 대형 원전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도심에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미국 일리노이주립대(UIUC)는 4세대 원전을 개발하는 USNC(Ultra Safe Nuclear Corporation)사와 손잡고 캠퍼스 내에 열 출력 20MW급의 발전 및 연구용 원자로를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 12월 미국 규제 기관에 REP(Regulatory Engagement Plan)를 제출한 걸 시작으로 프로젝트가 탄력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러운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첫 번째로, 캠퍼스는 인구가 많이 밀집되어 있음에도 안전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에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두 번째로는 USNC사가 개발 중인 노형은 아직 상용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초고온 가스로(VHTR)인데도 이런 실험을 캠퍼스가 받아들였다는 점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원자 안전성에 대한 공감대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형성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원자력 발전소를 서울 강남에 짓는다 해도 어느 누구도 안전성을 이유로 반대하는 일이 없도록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또한 전공자의 의무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가 공부하는 서울대 캠퍼스에, 아니면 제가 사는 강남에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서서 많은 사람이 혜택을 보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런 날을 기대해 봅니다.
 

곽승민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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